만년필에 관심을 가진지 이제 겨우 1년 정도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젤펜으로 많은 양을 쓰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힘이 덜 들어간다는 만년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었지요.
하지만 그러다보니 점점 펜 마다 개성이 뚜렷한 만년필에 빠져들었고..
어느새 곁에 여러 자루의 만년필들이 자리잡고 있답니다.

'쉐퍼'라는 브랜드는 많은 분들과 마찬가지로 제게도 생소했습니다.
좋은 펜을 만드는 오래된 회사라고는 하는데..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몇 달 전에 쉐퍼의 프리루드 만년필을 구한 뒤로,
제법 매력적인 펜을 만드는 회사라는 좋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약간 까실까실하면서도
부드럽고 일관성있게 잉크를 흘려보내는 것이 마음에 들더군요.
그래서 쉐퍼의 이미지도 그렇게 제 마음속에 자리잡았습니다.
펜 하나로 회사의 이미지를 잡는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쉐퍼에 관심을 가진 뒤로,
발로아라는 모델에 확 눈길이 갔었습니다.
독특한 닙 모양이 어찌나 매력적이던지요.
하지만 너무나 고가라서 살 수가 없었고, 시필조차 해볼 수 없었어요.
언젠가 교보에서 한 번 만져봤을 뿐이었는데,
순간 카드를 꺼낼까 고민했답니다. 간신히 참았지요.

그런데 쉐퍼에서 발로아 시필 기회를 준다는 말에, 눈이 번쩍 뜨이더군요.
시필 첫날 급히 매장으로 전화를 걸어서 문의를 했을 정도였으니까요.
1착으로 신청하고 며칠 뒤,
묵직한 나무 케이스에 담긴 발로아가 집에 왔습니다.
얼마나 두근거리던지.. 삼십대라는 나이가 무색해지더군요.

케이스에서 나온 발로아는 역시 매력적이었습니다.
검은 몸체 위에서 부드러운 선을 그리며 내려오는 금색 선.
유연하게 살짝 끝을 들고 있는 특유의 펜촉.
손이 큰 제게 착 감기듯 들어오는 그립감.
그 사이즈에 걸맞는 중후한 무게.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어울리게 힘있게 나오는 잉크 선.
프리루드와는 전혀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더군요.

제게 주어진 이틀이라는 시간 동안,
책상에 있을 때에 항상 손에 발로아를 들고 있었습니다.
도저히 손에서 떼어놓기가 어렵더군요.

어릴 적 읽던 무협지에서 주인공이 보검을 손에 들었을 때 느낌이 이랬을까요?

발로아가 제 곁을 떠난지 벌써 한 달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도 손에 그 감촉이 느껴지는 것 같아요.

결혼까지 한 수입이 변변찮은 인문계 대학원생에게
30만원 가량 하는 발로아를 구입하는 것은 꿈같은 일이지요.
처지에 맞지 않는 과분한 펜이라 구입은 먼 훗날로 미루었답니다.

하지만 사람은 추억을 가지고 산다고 하지요.

중후함과 부드러움, 곧음을 겸비한 발로아를 사용해본 경험은
아마 오랫동안 제 머릿속에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좋은 기회를 주신 쉐퍼와 베스트펜 관계자분들께
이 자리를 빌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